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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 인권 002]_난민으로 살게 된 나의 이야기

  • 2020.07.06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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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이야기는 수판 차크마님의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이주민으로서의 삶 

어릴 적 기억하기에 충분한 나이가 되었을 때부터 저희 어머니는 항상 믿음, 자신감과 판단력 세 단어를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될 것이라는 신념 
자신감: 나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판단력: 나 자신과 체계에 대한 신뢰 

이 세 가지 강한 단어들이 제 인생에서 가장 쉽고 어려웠던 선택들을 거의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습니다.  

제 이름은 수판 차크마입니다. 저는 1992년 10월 1일, 방글라데시의 딩기날라 우파질라에 있는 바부차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태어난 지 몇 개월 후, 우리 가족은 1993년에 일어난 불운한 사건으로 인해 살고 있던 곳을 달아나 난민 신분으로 근처의 인도 트리뿌라 주로 피신하였습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에 우리 가족은 종종 ‘불법 입국자’라고 불리며 5년 동안 난민캠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힘겹게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 시절을 회상해볼 때 오늘까지도 난민캠프에서 제 두 누나와 함께 자란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그 기억을 회상하는 것은 그곳에서의 어려웠지만, 진심으로 살아갔던 날들만큼이나 괴롭고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부족한 식량, 비위생적인 위생 시설, 빈곤과 질병 속 살아가고 싸워나갔습니다. 1998년, 우리 가족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방글라데시로 돌아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세계가 인정하지 않았고 어쩌면 영원히 인정하지 않을 26년 전 대학살을 피신한 후 제 부모님은 저에게 성공과 그 어떤 상황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불타는 포부를 심어주셨습니다. 힘들고 절대 ‘평범’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은 부모님의 경제적 신분에 대한 부끄러움, 이주민 신분에 대한 혼란, 그리고 군정부와 빈곤에 모든 것을 빼앗긴 기억들로 물들여졌습니다. 

교육의 가치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이해했던 것입니다. 제 부모님은 두 분 다 대학을 다닐 기회가 없었고, 이것 때문에 개인 생활과 사회생활 내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제가 어릴 때부터 배움에 대한 사랑과 노력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전념하였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 덕분에 저는 비록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어도 필요한 시간과 활력을 학업에 쏟을 수 있었습니다. 초등교육을 방글라데시 보육원 겸 기숙사 학교에서 마친 후 고등학교를 인도에서 권위 있는 국가장학금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치타공 구릉 지대 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방글라데시 정부가 사회 내 추구하는 벵골인 무슬림 단일민족화 정책입니다. 이것은 방글라데시 내 토착 줌머인 소수민족의 정체성 파괴를 암시합니다. ‘줌머’는 치타공 구릉 지대에 사는 11개의 부족을 통합적으로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수천 명의 벵골 정착민들이 치타공 구릉지대로 이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줌머 토착민들과 방글라데시 정부 간의 긴 분쟁이 1997년까지 계속되어 폭행, 공격, 불법 토지 횡령, 대학살 등 수많은 극악무도한 인권침해 사례들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1997년 12월 2일 궁극적으로 무력충돌을 공식 중단시킨 ‘CHT (치타공 구릉 지대)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하지만 CHT 협정에 포함되었던 비무장화 서약, 토착민을 위한 새로운 정치 체계, 토착민들의 토지 권리를 조사하고 유지하기 위한 ‘토지 위원회’ 등이 여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협정이 체결된 지 거의 2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수천 명의 토착민들이 토지 없이 사실상 군사점령 하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치타공 구릉 지대 원주민인 줌머족의 삶, 토지, 문화, 안보, 평화와 발전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저의 학업 성적은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제 성적은 고등학교 시절의 끈기와 강한 학습 의욕의 결과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며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하게 믿어왔습니다. 세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우리 동료 시민들을 괴롭히는 어려움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인류의 상황을 향상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이 열정을 믿으며 저는 방글라데시 한 지역 정당과 함께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이것이 제 사회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습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당원들과 조율하고 협력하면서 시민들을 동원하며 신문, 라디오, 휴대전화 등을 사용하여 정보를 배포했습니다. 수년간의 활동 기간 동안 치타공 구릉 지대에서 열린 거의 모든 시위와 집회에 참여했고 특히 랑가마티 지구에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지역 정당의 한 일원으로서 방글라데시 정부의 군사체계와 조직적인 인종청소 정책을 소리 높여 비판하였습니다. 

동시에 2015년 학사학위를 마친 후 방글라데시 상황이 매우 안 좋아지면서 사회 공헌을 위해 정치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선 정부가 우리의 목소리를 억압합니다. 이러한 억압은 제가 정부의 학대에 반대하는 학생시위에 참여하고 야당에 입당하여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견을 내세웠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정부의 지속적인 토지 탈취와 인권 침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으며 동원하자 군부가 화가 나 저에게 누명을 씌우고 저를 공격의 표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야당 일원으로서의 제 이력은 저를 정부의 인권 침해 표적이자 피해자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두 번 구금되었고 구금 중 과도한 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권 침해에 비추어 볼 때, 저는 고국에 머무르는 것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고 거의 2년 전에 방글라데시를 떠나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방글라데시와는 달리 저는 한국에 있으면서 이렇게 가슴 벅찬 적은 처음입니다. 이곳이 너무 좋습니다. 한국에 산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데 한국은 마치 제집처럼 편하고 저는 재한줌머인연대(JPNK)의 일원이 되면서 지역사회에 긍정적으로 받은 것을 되돌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온 이후로 제 정체성은 존중받았고 그것은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위대한 다문화적 공화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 국가에서 적응하고 배울 수 있다고 믿으며, 저의 잠재력을 의미 있고 완전한 방법으로 국가 건설에 기여할 수 있길 바랍니다. 

저는 한국 유명 대학 중 한 곳에서 석사 학위를 딸 계획을 하고있습니다.  
제가 박해로부터 목숨을 구하고 성실하고 인정받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꿈꿔봅니다. 

 

수판 차크마 Supan Chakma 
방글라데시 Bangladesh. 

번역: 손예진 인턴




휴먼아시아는 수판님의 이 이야기가 보편적인 인권이슈를 공유하고 고민하는 것에서 나아가 소수자 개개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느끼고, '인권'이 추상적 개념이 아닌 우리 삶 속에 녹아 있는 존엄한 가치로서 존중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교육의 가치를 알고, 자식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헌신하시는 부모님의 모습, 끊임없이 더 나은 사회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 하지 않는 모습은 우리 사회가 지나온 익숙한 기억과도 닮은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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